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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시론

<각계 전문가의 목소리> 학교예술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

발행일
2019.10.21
필자
이택광
소속
경희대학교 교수

 

 

   학교예술교육 철학의 정립을 위하여
  학교예술교육의 방법을 찾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그 교육의 철학을 먼저 고민해야하지 않을까 한다. 학교예술교육은 도구적인 차원을 넘어선 전인적 교육의 필수요소라고 유럽의 계몽주의는 일찍부터 선언했다. 아름다움은 사회적 합의에 따른 결과물이다. 지금 우리에게 아름답다고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둘러보면 우리 사회가 어떤 합의를 만들어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꿀벅지’와 ‘초콜릿복근’을 보자. 정형화한 ‘아이돌’의 이미지는 어떤가? 이들이 보여주는 ‘몸’은 단순한 살덩어리일 수 없다. 몸의 자본화라는 원리에 따른 ‘인공의 주형성’이 여기에 있다. 이 주형성에서 우리는 몸의 아름다움에 대한 집단적 집착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집착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칸트 식으로 말하자면, 몸의 아름다움은 쾌락적인 판단이다. 이것은 감정과 정서에 근거한다. 감각적인 판단을 거쳐서 쾌인지 불쾌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쾌와 불쾌를 나누는 것은 선악을 판단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욕망에 근거한 윤리적 판단을 통해 대상을 아름다움과 아름답지 않음으로 구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얼짱, 몸짱 신드롬을 거쳐서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성형열풍’은 모두 이런 윤리적 판단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실제로 아름다움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고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배운 것’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은 사회적 합의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조선시대의 <미인도>에 담겨 있는 미인의 기준이 지금 우리에게 통용되고 있는 그것과 다른 까닭이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들은 대개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들을 받아들이면서 우리 내면에 선험적으로 위치하게 된 것이다. 인상파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지금 누구도 인상파의 그림을 보고 이상하다거나 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19세기 파리에서 관객들은 인상파의 그림을 보고 비명을 지르거나 졸도하기까지 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아름다움은 학습의 산물’이라는 진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예술교육에 대한 철학들이 나온다. 예술을 통해 사회를 계몽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일정한 사실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쉴러나 러스킨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특히 러스킨은 문자보다도 시각이미지를 더 투명한 것으로 파악해서 미술교육을 강조했다.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도 그림을 그릴 수는 있다”는 진술은 예술교육을 계몽의 문제와 결합시켰던 러스킨 특유의 관점을 드러낸다.
  
   이렇게 예술을 학습의 산물로 본다면, 미학을 통해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다는 가설이 가능하다. 어떻게 인식을 바꿀 수 있는가? 칸트 식으로 말하면, 무관심한 판단이 여기에 해당한다. 감각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을 넘어선, 아니 이런 이해적 관계와 다른 무관심한 판단은 인식의 감각을 바꾼다. 이것이야말로 ‘낡은 감각’에서 새로운 것을 끄집어내는 계기이다. 무관심한 판단이야말로 미학적인 판단인데, 여기에서 윤리적 위계에 따라 판단하던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너진다. 
  
  미학은 오히려 윤리적 위계를 전복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윤리적 위계란 사회에서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건전한 상식에 대한 도전을 내포한다. 예술교육은 이런 건전한 상식을 뒤집어볼 수 있는 실험정신을 배우고 가르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아름답다고 속삭인다. 아니 역으로, 욕망의 판단-쾌락원칙에 들어맞는 ‘아름다움’만을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한다. 기본적으로 정상적인 것은 합의된 아름다움을 반복한다. 이런 정상적인 아름다움은 형식을 반복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반복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새로운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저항이다. 새로운 것은 합의된 것들에 대한 의심을 통해 발생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렇게 합의를 깨트리는 새로운 미학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의 다른 차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미학의 출현은 언제나 상식의 선을 깨트릴 때 가능하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들은 새털처럼 많다. 특히 근대의 시작을 알리면서 등장한 리얼리즘이 그렇다. 천사를 그려달라는 주문에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시오. 그러면 그려주겠소”라고 대답했다는 쿠르베의 일화는 새로운 세계관으로서 리얼리즘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쿠르베의 반항기가 이런 발언을 하게 했던 것만은 아니다. 리얼리스트 쿠르베는 보는 것만을 그리는 근대적 경험의 눈을 가진 존재였고, 이를 통해 자신의 욕망으로 세계를 읽고자 하는 의지에 충만했다고 하겠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론과 실기를 양분해서 어느 쪽에 더 우위를 둘 것인지를 고민하는 예술가의 문제의식을 속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다. 미학은 특정한 시대를 지배하는 상식적인 것이고, 예술가는 이 상식을 넘어서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하는 창조자이다. 그리고 이 창조를 위해 필요한 것은 이미 체계화해 있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대한 숙지다. 무엇이 낡은 것인지를 알아야 무엇이 새로운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러나 말이 쉽지 상식을 넘어간다는 것은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다.
  
  한 시대의 합의를 넘어서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또 그것을 현실화한다는 측면에서 예술가의 임무는 단순히 미학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정치라는 것이 내용적인 측면에서 정치적인 구호나 이념을 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과거 한국의 민중미술이 정치적일 수 있었던 까닭은 그 내용에서 정치적인 이념을 표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더러 그런 작품이 없지는 않았지만, 엄밀히 말해 민중미술의 정치성은 내용보다 형식에서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일반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없던 미술작품을 거리에서 전시한다든가, 보편적인 이념을 표현하던 추상미술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고전적인 미학에 집착하던 한국 미술을 일순간에 현실의 차원으로 끌어내려 비료포대 위에 농부를 그리고, 광목천에 군중을 그려냈던 그 형식의 파격에서 민중미술은 정치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대중은 새로운 미학적 체계를 구축했고, 그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다른 주체성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때 만들어진 주체성의 범주에서 아직도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민중미술의 파장이 동시대로 끝나버렸다는 판단은 너무 성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리얼리즘이나 인상파의 그림들도 당시의 맥락에서 본다면 '민중미술'이었던 것인데, 역사적 상황으로 예술을 다시 갖다놓는 순간, 우리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가치를 다시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단순하게 특정한 대상을 적절하게 복제하는 것이라기보다 새로운 세계관을 통해 사물의 질서를 구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필수적인 것은 바로 세계에 대한 관점을 확립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이론이다. 이론과 실기는 예술에서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지,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둘을 조화시키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학교예술교육의 역할이라고 본다. 지금이야말로 기존의 틀을 넘어서서 학교예술교육의 철학을 정립해야할 때라는 생각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격언을 되새겨야 하겠다. ___________ⓔ

 

원고는 집필자의 전문적 시각으로 작성된 것으로

교육정책네트워크 및 한국교육개발원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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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교수는 영국 워릭대학교와 셰필드대학교에서 각각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 <버지니아 울프 북클럽>, <빨간 잉크>, <반 고흐와 고갱의 유토피아>가 있다.

필자
이택광
소속
경희대학교 교수
발행일
2019.10.21